오바댜(10)


3.4. ‘온유’라는 단어에 대해 제가 배운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온유’는 특별한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온유’는 ‘여유(margin)’라는 뜻에 더 가깝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종이에 글을 쓸 때, 위아래 그리고 좌우에 아무런 여백 없이 글을 쓰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게 남겨둔 여유를 ‘온유’라고 합니다. 나에게 100만큼의 능력이 있는데, 모두 사용하지 않고 80 내지 90 정도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여유라고 합니다. 나의 능력보다 더 많은 것을 사용하는 것이 ‘교만’이지요. 더 쉽게 다시 말씀드리면, 나에게 10,000원이 있습니다. 10,000원을 다 쓰면 여유가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10,000원보다 더 많이 쓰면 빚을 지게 됩니다. 교만이요 건방진 것이지요. 8,000원이나 9,000원 정도를 쓰고 1,000원이나 2,000원 정도를 남겨 놓습니다.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남겨놓는 겁니다. 그것이 ‘온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온유’의 전형적인 모델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Malchus)의 귀를 베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그 귀를 만지시며 하신 말씀 기억하십니까?


Apostle Peter striking the High Priests’ servant Malchus with a sword in the Garden of Gethsemane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마 26:53)

예수님이야말로 ‘온유’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계시지만, 모든 천사를 부릴 능력을 다 쓰지 않으시고 친히 십자가의 처형을 받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에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충분히 천군 천사에게 명령을 내리실 능력이 있지만 우리를 위해 쓰지 않고 남겨 두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만하십니까? 건방집니까?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처럼 ‘온유’합니까? 그 ‘온유’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시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관주로 연결되어 있는 구절 하나를 찾아보고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아마샤가 담력을 내어 그의 백성을 거느리고 소금 골짜기에 이르러 
세일 자손 만 명을 죽이고, 
유다 자손이 또 만 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바위 꼭대기에 올라가서 
거기서 밀쳐 내려뜨려서 그들의 온 몸이 부서지게 하였더라. (대하 25:11-12)

유다 왕 아마샤(Amzaziah) 때의 일입니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 유다 사람들은 에돔과 전쟁을 합니다. 대를 이어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에돔입니다. 11절에 세일 자손 만 명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2절은 포로 만 명을 잡아 처형시키는 장면입니다. 높은 바위위에 올라가 밀어버립니다. 실제로 바위 꼭대기에서 끌어내리는 장면입니다. 영화 <300>의 한 장면처럼 말이죠. 에돔 족속은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고 건방지게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끌어내리십니다. 다음 절에 확실하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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