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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댜(24)

B. 주의 나라가 이루어짐(19-21) 그들이 네겝과 에서의 산과 평지와 블레셋을 얻을 것이요,  또 그들이 에브라임의 들과 사마리아의 들을 얻을 것이며,  베냐민은 길르앗을 얻을 것이며,  사로잡혔던 이스라엘의 많은 자손은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이 땅을 사르밧까지 얻을 것이며,  예루살렘에서 사로잡혔던 자들, 곧 스바랏에 있는 자들은 네겝의 성읍들을 얻을 것이니라.  구원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옵 19-21) 19.1. 생소한 지명이 많이 나옵니다. 간단하게 찾아봅니다. 네겝(Negev)은 히브리어로 '황무지(荒無地)'라는 뜻으로 이스라엘 남부에 있는 사막입니다. 에서의 산은 앞에서 보았습니다. 블레셋(Philistines)의 평지, 즉 팔레스타인 지방을 말합니다. 사마리아(Samaria)는 에브라임(Ephraim)의 수도입니다. 길르앗(Gilead)은 ‘울퉁불퉁한 낙타봉,’ ‘강하다’는 뜻으로 갈릴리 저지대로부터 사해 북단에 이르며, 요단 강에서 동편으로 사막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땅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동쪽으로 암몬, 서쪽으로 요단 강, 남쪽으로 모압, 북쪽으로 바산에 둘러싸인 지역으로 얍복 강에 의해 남북이 나누어집니다. 주요 성읍은 북쪽에 많이 펼쳐져 있는데, 길르앗 라못, 길르앗 야베스, 마하나임, 숙곳이 있고, 신약의 거라사 등이 이 지방에 속합니다. 해발 약 600m의 고원으로, 물이 많고 방목하기에 좋을 만큼 초목과 수풀이 잘 갖춰진 지역이었습니다(민 32:1; 대상 5:9; 아 4:1). 포도, 올리브(감람), 유향, 약초 등이 유명한데, 특히 유향은 품질이 우수하여 두로에 수출되기도 했습니다(겔 27:17). 야곱과 라반이 언약을 맺고 ‘증거의 무더기’(길르엣)를 쌓은 것이 지명의 유래가 되었습니다(창 31:7-47). 세월이 흐르면서 이곳은 길르앗 산(창 31:25), 길르앗 땅...

오바댜(23)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며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요,  에서 족속은 지푸라기가 될 것이라.  그들이 그들 위에 붙어서 그들을 불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옵 17-18) 여기서부터 야곱 족속에 대한 축복의 말씀이 나타납니다. 시온 산(Mount Zion)은 하나님의 거룩을 상징합니다.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 중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 (사 4:2-4)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세력을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 심판의 영(the spirit of judgment)과 소멸하는 영(the spirit of burning)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이들을 대적하는 사탄의 세력을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심판의 영과 소멸하는 영이 우리의 더러움을 씻기시고 정결하며 거룩하게 해 주십니다. 대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그 심판에서 머물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우리의 우둔함을, 우리의 불순종마저도 씻겨주시고 거룩하게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십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에겐 멸망의 심판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이들에겐 회복의 심판입니다.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오바댜(22)

Ⅲ. 주의 날(15-21) A. 만국에 대한 심판과 시온의 구원(15-18)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너희가 내 성산에서 마신 것 같이 만국인이 항상 마시리니,  곧 마시고 삼켜서 본래 없던 것 같이 되리라.” (옵 15-16) 오바댜를 통한 에돔에 대한 거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에돔이 행한 대로 에돔이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행한 것이 그들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칼을 사용하여 형제와 이웃을 핍박한 자들은 그들이 핍박한 그대로 보복당합니다. 12절에서 14절까지 기록된 에돔의 포악이 그대로 에돔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읽기에 가장 단순하면서도 실행하기에 가장 어려운 성경 말씀 중의 하나가 ‘심은대로 거둔다’라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고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갈 6:7-10)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납니다. 부정적인 것을 심으면 부정적인 것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정결하지 않은 것을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에돔은 포악을 심었습니다. 그리고 에돔은 칼과 피를 받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날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날은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의 대적에게 원수 갚는 보복일이라.  칼이 배부르게 삼키며, 그들의 피를 넘치도록 마시리니, … (렘 46:10a) 네가 여러 나...

오바댜(21)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네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원수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니라.” (옵 12-14) 에돔의 죄를 하나씩 고발하고 있습니다. 에돔이 이스라엘의 형제 맞습니까? 에서가 야곱의 형제 맞습니까? 이 구절을 보면 형제가 아니라 철천지 원수입니다. 에돔의 포악은 이미 보았으므로, 여기서는 관주를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고,  그가 재난을 당함으로 즐거워하였던가? (욥 31:29)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잠 24:17-18)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지니라. (잠 17:5)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온 땅이 즐거워할 때에 내가 너를 황폐하게 하되,  이스라엘 족속의 기업이 황폐하므로  네가 즐거워한 것 같이 내가 너를 황폐하게 하리라.  세일 산아, 너와 에돔 온 땅이 황폐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무리가 알리라.” … (겔 35:15)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

오바댜(20)

10.2.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침략을 받은 당시와 오바댜의 시대가 같은 시대인지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여기서는 바벨론의 침략을 기록한 성경을 찾아봅니다. 지금 찾아서 한 번 상상하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열왕기하 25:1-21, 역대하 36:5-21, 예레미야 52장 등입니다. 그 중 몇 구절을 옮겨봅니다. 그의 백성[유다 자손]이 하나님의 사신들을 비웃고,  그[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의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그의 백성에게 미치게 하여  회복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그들을 다 넘기시매,  그가 와서 그들의 성전에서 칼로 청년들을 죽이며,  청년 남녀와 노인과 병약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또 하나님의 전의 대소 그릇들과 여호와의 전의 보물과  왕과 방백들의 보물을 다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또 하나님의 전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벽을 헐며,  그들의 모든 궁실을 불사르며, 그들의 모든 귀한 그릇을 부수고,  칼에서 살아 남은 자를 그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의 자손과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통치할 때까지 이르니라. (대하 36:16-20) 그들[갈대아 군대]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더라. (왕하 25:7) 바벨론 왕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 앞에서 죽이고,  또 리블라에서 유다의 모든 고관을 죽이며,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 왕이 그를 바벨론으로 끌고 가서  그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더라. (렘 52:10-11) 그가 포로가 되어 사...

오바댜(19)

2. 이스라엘에 대한 에돔의 범죄(11-14)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 (옵 11) 11.1. 이스라엘 자손이 위험에 처한 날입니다. 나라가 망하는 날입니다. 이방인들이 쳐들어 오는 날입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입니다. 여기저기서 노략질이 일어납니다. 예루살렘 시민들이 이방인의 칼에 죽임을 당합니다. 이쪽 골목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가 목놓아 울고 있습니다. 저쪽 골목에서 아들을 잃은 할머니가 실신합니다. 건물은 불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도망가느라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어디로 피난가야 하는지 모르면서도 그저 무작정 뛰고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손을 잡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아이가 없어졌습니다. 아이를 찾으러 다시 돌아가려 하지만 몰려드는 난민으로 발걸음을 떼기는커녕 몰려오는 이방인의 칼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들 속에 파묻혀 버립니다. 그야말로 처참합니다. 침략군들은 노략질하느라 정신없습니다. 보이는 대로 죽이고 금과 은 등 패물을 닥치는 대로 앗아갑니다. 이 부대는 이 지역을 맡아 부녀자를 겁탈하고 노략질합니다. 저 부대는 저 지역을 맡아 살육을 저지릅니다. 아비규환입니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바로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도 백주대낮에 말입니다. 바로 그 날에, 형제 이스라엘이 수탈당하던 바로 그 날에, 에돔은 이스라엘을 도와주기는커녕(아니 방관하기라도 하면 다행이겠지만), 침략군과 함께 합세해서 예루살렘을 노략질합니다. 부녀자들을 겁탈합니다. 아이들을 죽입니다. 패물을 강탈합니다.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친구를 팔아 넘기는구나. (욥 6:27) 또 제비 뽑아 내 백성을 끌어 가서,  소년을 기생과 바꾸며, 소녀를 술과 바꾸어 마셨음이니라. (욜 3:3) 상상할 수 있습니까...

오바댜(18)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옵 10) 10.1. 지금까지 에돔의 건방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다면, 여기서부터는 에돔의 구체적인 죄를 고발합니다. 에돔은 에서의 형제 야곱에게 몹쓸 짓을 했습니다. 에서의 후예 에돔과 야곱의 후예 이스라엘 사이의 질기고 질긴 악연은 이 글의 초반에 살펴보았습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태 속에서부터 싸워온 두 민족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통과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즈음에 에돔은 이스라엘을 훼방하였습니다(민 20:14-21). 오죽하면 그 영화롭던 솔로몬의 시대에도 이스라엘에게 환난을 끼쳤을까요(왕상 11:25). 그리고 그 후로도 에돔은 틈만 나면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그것도 포학(violence)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에돔은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됩니다. 그러나 애굽은 황무지가 되겠고, 에돔은 황무한 들이 되리니,  이는 그들이 유다 자손에게 포악을 행하여  무죄한 피를 그 땅에서 흘렸음이니라. (욜 3:19) 시편 기자도 탄원을 올리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시 137:7) 10.2.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에돔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칼로 그의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항상 맹렬히 화를 내며, 분을 끝없이 품었음이라.  내가 데만에 불을 보내리니, 보스라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암 1:11-12)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에돔이 유다 족...

오바댜(17)

“드만아, 네 용사들이 놀랄 것이라.  이로 말미암아 에서의 산에 있는 사람은 다 죽임을 당하여 멸절되리라.” (옵 9) 9.1. 드만(Teman)? 좀 생소한 이름입니다. 그래서 찾아보았습니다. 세일 산에 있는 에돔 족속의 조상 에서의 족보는 이러하고,  그 자손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아내 아다의 아들은 엘리바스요 …  엘리바스의 아들들은 데만과 … (창 36:9-11)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린 왕은 이러하니라.  브올의 아들 벨라니  그의 도성 이름은 딘하바이며,  벨라가 죽으매  보스라 세라의 아들 요밥이 대신하여 왕이 되고,  요밥이 죽으매  데만 종족의 땅의 사람 후삼이 대신하여 왕이 되고,  후삼이 죽으매  브닷의 아들 하닷이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 … (대상 1:43-46) 에돔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런즉 에돔에 대한 여호와의 의도와 데만 주민에 대하여  결심하신 여호와의 계획을 들으라.  양 떼의 어린 것들을 그들이 반드시 끌고 다니며 괴롭히고  그 처소로 황폐하게 하지 않으랴? (렘 49:20) 재미있는 것은 욥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 (욥 2:11) 이 엘리바스가 창세기 36:10의 엘리바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재앙을 당한 욥에게 여러차례 말합니다. (욥 4-5장; 15장; 22장) 하지만 그의 말 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의 말도 욥의 말...

오바댜(16)

B. 에돔 멸망의 재확인(8-14) 1. 에돔의 수치와 멸망(8-1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에돔에서 지혜 있는 자를 멸하며,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를 멸하지 아니하겠느냐?” (옵 8) 8.1. ‘그 날’이 언제일까요? 에돔에서 지혜 있는 자가 멸망당하고,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가 멸망당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가리킵니다. 독수리처럼 높은 산에 기거하고, 난공불락의 요새인 바위틈에 살고, 심지어 하늘의 별 사이에 살더라도, 하나님께서 끌어내리시는 날 말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같은 내용을 두 번 반복해서 기록한 것을 자주 만납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돔에서 지혜 있는 자를 멸하며’와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를 멸하지 아니하겠느냐?’라는 같은 말씀이 두 번 반복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확증입니다. 분명히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보통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이 이루어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심판이나 저주가 아닌 축복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이루어지는 것을 믿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은혜의 말씀이지요.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말씀이지요. 감사한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도 당연히 그렇지 않을까요?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축복의 말씀이 이루어지길 소망하면서도 심판의 말씀을 듣기는 꺼려하는 것 같습니다. 12월 31일 밤에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며 새해에 주시는 말씀카드를 뽑습니다. 축복의 말씀카드를 뽑으면 얼굴이 환하게 펴지며 미소가 떠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심판까지는 아니더라도 징계의 말씀이나 또는 마음에 부담을 갖게 하는 말씀을 뽑으면, 한숨을 내쉬며 카드를 빨리 숨깁니다.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해보면, 축복의 말씀이나 징계의 말씀 모두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언약의 말씀입니다. 물론 저주, 심판, 징계 등의 낱말보다는 은혜, 축복 등의 낱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그런 ...

오바댜(15)

7.3. 충성과 짝이 될만한 덕목이 정직이지 싶습니다. 몇 구절을 찾아봅니다.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 (사 26:7)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 (잠 21:2) 개역개정에는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신다.’라고 좀 어려운 말이 사용됩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야훼께서는 그 마음을 헤아리신다.’라고 기록합니다. 새번역은 ‘주님께서는 그 마음을 꿰뚫어 보신다.’라고 기록합니다. KJV은 ‘그 마음을 숙고하신다(곰곰이 생각하신다, ponder).’라고 기록합니다. NLT는 ‘그 마음을 조사하신다(시험을 실시하신다, examine).’라고 기록합니다. Message는 한 술 더 떠서 ‘우리의 동기를 조사하신다(examines our motives).’라고 기록합니다. 다른 영역본들은 ‘마음의 무게를 달아 저울질 하신다(weigh).’라고 기록합니다. 사람의 속내를 헤아려 보신다(잠 24:12)는 말이겠지요.  저는 하나님께서 감찰하시든, 헤아리시든, 꿰뚫어 보시든, 숙고하시든, 조사하시든, 검사하시든, 시험을 치시시든, 저울질하시든, 그 모든 것이 나를 얽매고 꼼짝달싹못하게 하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마치 인공위성을 사용한 GPS로 나의 모든 행동반경을 감시하시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골목마다 있는 CCTV로 나의 모든 행동과 마음의 동기까지 감시하며 저울질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길을 걸을 때도 당당하게 하늘을 보고 걷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채 걷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하나님, 용서하소서. 아직도 그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단순히 벌을 받기 싫어서, 아니 두려워서 착한 척, 의로운(?) 척하는 행태를 보여왔습니다. 그러니 위선이, 가짜의 선이 나를 지배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고 싶지만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인공위성이나 CCTV가 나를 보호할...

오바댜(14)

너와 약조한 모든 자들이 다 너를 쫓아 변경에 이르게 하며,  너와 화목하던 자들이 너를 속여 이기며,  네 먹을 것을 먹는 자들이 네 아래에 함정을 파니,  네 마음에 지각이 없음이로다. (옵 7) 7.1. 에돔과 약조한 자들이 누구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을 제외한 주변 모든 나라들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출애굽할 당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적대시한 주변의 모든 나라들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나라들과 에돔 족속은 약조를 맺습니다.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에돔의 옛 친구들이 에돔을 가장자리로 몰아냅니다. 에돔의 오랜 친구들이 에돔의 면전에서 거짓말을 합니다. 함께 술을 마시며 즐기던 친구들이 에돔의 등에 칼을 꽂습니다. 사람의 약조가 이렇습니다. 물론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배반하지 않으리라고 봅니다만, 워낙 사탄의 세력이 크니까 방심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까? 천하에 나 홀로 있는 것만 같고,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나를 대적하고 나를 쓰러지게 하는 것 말입니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작당을 해서 나를 넘어뜨리고 쓰러지게 합니다. 나는 혼자인데 상대의 수는 엄청납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엘리야입니다. 그 악명 높은 아합왕 시대에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엘리야 선지자 말입니다.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엘리야]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왕상 18:22)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물론 같은 마음, 같은 말, 같은 뜻을 가지고 같은 열매를 맺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충성스럽고 신실한 동역자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먼저 충성스러운 동역자가 되어야 하고, 또 그런 신실한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 또는 통찰력도 지녀야 하겠지요. 7.2. 어쨌거나, 오바댜는 에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오바댜(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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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예레미야서에서 같은 내용의 구절을 읽어보고 다시 오바댜서로 돌아갑니다. 포도를 거두는 자들이 네게 이르면 약간의 열매도 남기지 아니하겠고,  밤에 도둑이 오면 그 욕심이 차기까지 멸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에서의 옷을 벗겨 그 숨은 곳이 드러나게 하였나니,  그가 그 몸을 숨길 수 없을 것이라.  그 자손과 형제와 이웃이 멸망하였은즉 그가 없어졌느니라. (렘 49:9-10) 에돔의 경우는 달랐던 모양입니다. 5절 마지막에 “네가 어찌 그리 망하였는고?”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그 부분이 5절 마지막에 있지만 영어성경에는 도둑과 강도를 언급한 다음에 있습니다. 포도를 언급하기 전에 있다는 말이지요. 그건 그렇고, 에돔을 침략하는 자들은 정말 도둑같이 그리고 강도같이 밤에 와서 모든 것을 수탈해 갑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에돔 족속은 천혜의 요새인 페트라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적들이 이 페트라를 침공하려면 밤에 몰래 침공하는 것이 그나마 괜찮은 작전이었을 겁니다. 역시 악의 세력은(물론 에돔도 악하지만) 빛이 없는 밤에 활동하는군요. 낮엔 에돔 족속들이 눈에 불을 켜고 방어할 겁니다. 그러나 밤에는 자기들이 기거하는 산성을 믿고 방비를 좀 허술하게 하기도 하겠지요. 에돔의 마지막은 수탈 그리고 그들이 감춘 보물은 모조리 빼앗길 것입니다. 그렇게 기고만장하고, 그렇게 교만하고, 그렇게 건방지며, 그렇게 자신 있어 하던 에돔이 수탈당하고 모든 보물을 빼앗기는 지경까지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아무래도 교만과 겸손에 관한 구절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구절들이지만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십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 16:18)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교만을 이같이 썩...

오바댜(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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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에돔의 철저한 멸망(5-7) 혹시 도둑이 네게 이르렀으며 강도가 밤중에 네게 이르렀을지라도,  만족할 만큼 훔치면 그치지 아니하였겠느냐?  혹시 포도를 따는 자가 네게 이르렀을지라도,  그것을 얼마쯤 남기지 아니하였겠느냐?  네가 어찌 그리 망하였는고?  에서가 어찌 그리 수탈되었으며 그 감춘 보물이 어찌 그리 빼앗겼는고? (옵 5-6) 5.1. 동물의 세계를 찍은 다큐멘터리를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더라도 배가 부르면 그만 둡니다. 아무리 포식자라 하더라도 먹을 만큼만 잡아먹고 그만 둡니다. 어떤 다큐멘터리를 보더라도 사자가 욕심을 부려서 더 잡아먹는 내용은 없습니다. “아, 내일을 위해서 더 잡아먹어야지. 아니야, 지금은 배가 부르니까 잡아먹지는 않겠지만, 내일을 위해서 다섯 마리를 미리 잡아두어야지.”라고 말하는 사자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때그때 먹을 만큼만 잡아먹습니다. 그렇게 생태계가 유지되는 모양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 방법이지요.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강도사건이 일어난 뉴스를 보면 깡그리 다 훔쳐갑니다. 남김없이 다 훔쳐갑니다. 물건만 훔쳐가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마저 해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을 그렇게 묘사하셨겠습니까? 비단 도둑뿐만이 아닙니다. 사람은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습니다.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욕심을 부려서 더 먹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배불러 죽겠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많이 먹고 욕심을 부리면 배가 불러서 죽을까요? 고대 로마인들의 이야기를 들어서 아실 겁니다. 먹을 것이 남아돌았던 그 당시에 귀족들은 먹고, 토하고, 또 먹고, 또 토하고, 먹고, 또 토하고…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조차 ...

오바댜(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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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옵 4) Eastern imperial eagle – in Israel 4.1. 인간은 높은 산성에 몸을 숨기면 안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건방지게 되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대답을 보십시오. 독수리처럼 높이 올라 별 사이에 둥지(실제로 영역본에서는 ‘둥지’를 뜻하는 단어 ‘nest’를 사용했습니다.)를 틀더라도, 거기에서 끌어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독수리는 예리한 시력과 하늘을 나는 힘으로 자부심 또는 제왕의 상징이 되곤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로마는 독수리를 황제의 상징으로 삼았지요. 그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현대에도 독수리를 나라의 상징으로 삼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스포츠 팀도 그렇습니다. 매력적인 동물임에 틀림없습니다. 성경에서도 독수리를 자주 언급합니다. 모든 구절을 다 찾지 않아도 상식만으로도 독수리의 위엄을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 봅니다. 찬송가로도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사 40:31) 하여간, 에돔 족속은 높은 산 바위틈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건방짐은 하늘을 찌릅니다. 하늘을 찌르다 못해 별 사이에 둥지를 틀겠다고 합니다. 북두칠성, 오리온, 카시오페아 등등… 달에 가는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인데 별 사이에 둥지를 튼다고 호언합니다. 물론 과장법이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에돔의 교만이 그렇습니다. 나의 건방짐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거기에서도 끌어내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교만을 싫어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한 내용을 인용해볼까요?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

오바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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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온유’라는 단어에 대해 제가 배운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온유’는 특별한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온유’는 ‘여유(margin)’라는 뜻에 더 가깝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종이에 글을 쓸 때, 위아래 그리고 좌우에 아무런 여백 없이 글을 쓰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게 남겨둔 여유를 ‘온유’라고 합니다. 나에게 100만큼의 능력이 있는데, 모두 사용하지 않고 80 내지 90 정도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여유라고 합니다. 나의 능력보다 더 많은 것을 사용하는 것이 ‘교만’이지요. 더 쉽게 다시 말씀드리면, 나에게 10,000원이 있습니다. 10,000원을 다 쓰면 여유가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10,000원보다 더 많이 쓰면 빚을 지게 됩니다. 교만이요 건방진 것이지요. 8,000원이나 9,000원 정도를 쓰고 1,000원이나 2,000원 정도를 남겨 놓습니다.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남겨놓는 겁니다. 그것이 ‘온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온유’의 전형적인 모델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Malchus)의 귀를 베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그 귀를 만지시며 하신 말씀 기억하십니까? Apostle Peter striking the High Priests’ servant Malchus with a sword in the Garden of Gethsemane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마 26:53) 예수님이야말로 ‘온유’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계시지만, 모든 천사를 부릴 능력을 다 쓰지 않으시고 친히 십자가의 처형을 받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에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충분히 천군 천사에게 명령을 내리실 능력이 있지만 우리를 위해 쓰지 않고 남겨 두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만하십니까? 건방집니까?...

오바댜(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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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이쯤에서 교만(驕慢, arrogance)의 설명을 라이프성경사전을 통해 알아봅시다. 잘난 체하며 겸손하지 않고 방자히 행하며, 능력을 과시하며 자기를 최고로 자랑하는 행위입니다. 성경에서 교만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부인하는 최고의 범죄 행위로 간주하고 있습니다(시 18:27; 잠 29:23; 렘 50:31). 오만(傲慢), 거만(倨慢)으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교만하다가 실패한 자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①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방해한 바로(출 5:2), ② 에스더(Esther) 당시 유다 민족을 전멸시키려 했던 페르시아 제국의 총리 하만(Haman, 에 3:5) ③ 신(神)으로 자처하다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 군대에게 멸망당한 두로 왕(겔 28:2-9), ④ 이스라엘 멸망을 기뻐하며 자만하다 멸망한 모압인(Moabites, 렘 48:29), ⑤ 자신이 건설한 제국의 위용을 과시하다 정신 질환에 걸려 짐승처럼 행세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단 4:30), 그리고 ⑥ 성전 기물로 유흥을 베풀면서 자신을 높이다 나라를 잃은 바벨론의 마지막 왕 벨사살(Belshazzar, 단 5:23) 등이 있습니다. "All Is Vanity" by C. Allan Gilbert, evoking the inevitable decay of life and beauty toward death 교만에 관해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교만의 반대말이 ‘겸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먼저 겸손(謙遜, humility)을 볼까요? 자신(마음)을 낮추며 상대방을 인정하고 높이는 욕심 없는 마음 상태입니다. 겸손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요구되는 신앙 덕목입니다(신 8:2; 대하 7:14). … 겸손의 모범을 보이신 가장 대표적인 분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사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죄인들을 사랑하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오바댜(8)

3.2. 저는 돈과 명예와 권력만 예를 들었지만, 그 외에도 사람들마다 보호막으로 삼고 있는 것이 많을 겁니다. 이런 사람도 보았습니다. 아는 분을 방문하러 그분이 사는 아파트에 찾아갔습니다. 경비아저씨에게 아무개를 찾아왔다고 하니 얼마나 거드름을 피우는지. 자기의 임무인 경비를 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거만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NASB에서는 우리가 많이 보아온 ‘pride’라는 단어 대신 ‘거만, 오만, 건방짐’이라는 ‘arrogance’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쥐꼬리만한 권력을 쥐고도 거만합니다. 오만방자한 사람들을 분명히 보셨을 겁니다. 아주 건방진 사람들을 보셨을 겁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지금도 그런지 모르지요. 아마 그럴 겁니다. 왜냐하면 나도 모르게 속기 때문입니다.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무서운 말씀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건방짐(저는 개인적으로 교만이라는 단어보다는 건방짐이라는 단어가 더 와 닿습니다만)이 내 마음 속에 똬리를 틀고 고개를 쳐드는 것을 너무나 자주 봅니다. 내가 무언가를 알고 있고 상대방은 그걸 모를 때, 건방짐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너는 이거 모르지? 난 알고 있어.” “나라면 그렇게 운전하지 않을 거야.” “에이, 저 사람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군.” 사실 저는 이전까지 교만이 나를 속인다는 표현을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저 교만하면, 건방지면 좋지 않은 것이다. 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 건방짐이 나를 속이고 있습니다. 나의 손을 잡아 파멸로 이끌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속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더 적나라한 말로 해 볼까요? 나에게 사기 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나름대로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살아가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온갖 말로 유혹하며 꾀어서 나를 속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너무나 분이 나서 잠을 이루지 못할 겁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을 죽이고 싶은(저는 결코 지나친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마...

오바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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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옵 3) 3.1. 에돔에 대한 말씀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에돔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지만, 우리에게도, 아니 나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에돔의 마음의 교만(pride)이 에돔을 속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교만… 참으로 무서운 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만에 관한 성경 구절은 너무나 많습니다. 일일이 다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지요. 아담이 사탄(Satan)의 유혹에 넘어간 것도 교만이라는 무서운 적이 마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후 사탄은 우리 인간을 넘어뜨리기 위해 교만을 가장 치명적인 무기들 중의 하나로 사용해 왔습니다. 그럼 에돔이 마음에 품은 교만은 무엇이었을까요? Tourists in front of Al Khazneh (The Treasury) at Petra 이들은 바위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서 살았던 모양입니다. 혹시 길을 걷다가 발을 헛디뎌 돌멩이를 찬 적이 있습니까? 아픕니다. 채석장에 가 본 적은 없지만, 바위를 쪼개는 일은 정말 힘든 일임에 틀림없을 겁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구석기시대 또는 신석기 시대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어쨌든, 돌을 부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얼마 전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반지의 제왕’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돌로 만든 성벽을 돌파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고구려인들은 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석성을 쌓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튼튼한지 수나라와 당나라가 100만이 넘는 병력을 동원하여 여러 번 침략해서 성을 공략해도 요지부동이었습니다. 특히 요동성이 얼마나 단단한지 말이죠. 그래서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요동성은 요(지부)동성이다라고. 현대에도 길을 만들기 위해 산을 깎고 터널을 만들려면 엄청난 양의 폭탄이 필요합니다. 하물며 그 옛날이겠습...

오바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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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세일(Seir)은 다음 구절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민수기에서 보듯이, 에돔에 대한 예언은 출애굽 당시부터 있었습니다. 아니, 따지고 보면 어머니 리브가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에돔에 대한 예언은 있었습니다(창 25:23). 하여간, 에돔과 세일은 정복당하리라는 예언입니다. Message의 표현이 정말 재미있습니다. “경매에 나온 에돔이 팔리는 것을 보고, 벼룩시장에 나온 세일(Seir)을 보지만, 이스라엘은 트로피를 들고 당당히 걷는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에돔을 미워하셨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그만큼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잠시 말라기(Malachi)를 찾아보겠습니다. Matthias Stom, Esau [right] selling his birthright to Jacob or The Lentil Stew, 17th century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말 1:2-4) 이 구절을 위대한 사도 바울(Paul)이 인용했습니다. 볼까요?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3) 그 외에도 에돔을 미워하시고 심판의 칼날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곳저곳에서 봅니다. 다 옮겨 쓰지는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오바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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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에돔에 대한 심판(2-14) A. 에돔의 멸망에 대한 선언(2-7) 1. 에돔의 교만을 낮추심(2-4) “보라, 내가 너를 나라들 가운데에 매우 작게 하였으므로  네가 크게 멸시를 받느니라.” (옵 2) 2.1.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본격적으로 나옵니다. 우리말의 개역개정판에는 “내가 너를 나라들 가운데에 매우 작게 하였으므로…”라고 과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사용했던 개역한글판에도 “내가 너를 열국 중에 미약하게 하였으므로…”라고 과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KJV만 “I have made thee small among the heathen”이라고 현재완료형(우리말의 현재와 과거를 다 아우르는 시제)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른 영어번역본들은 모두 미래 시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돔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라면 미래형이 더 와 닿습니다.   The region around 830 BC, with Edom in yellow. 시제야 어떻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에돔을 작게 만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에돔을 작게 만들겠다는 말씀입니다. 관주를 살펴보니 민수기 24:18로 가보라고 합니다. 일단 민수기 24:18을 찾아봅니다. 그 구절만 읽는 것은 큰 의미가 없군요. 좀 더 앞으로 가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홍해를 건너 요단(Jordan)강까지 왔을 때입니다.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Jericho) 맞은편인 모압(Moab) 평지에 진을 쳤습니다(민 22:1). 당시 모압 왕인 발락(Balak)이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많은 이스라엘 자손 때문에 번민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민 22:2-3). 그래서 발락은 발람(Balaam)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라고 뇌물을 주며 부탁합니다(민 22:6-7). 그런데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임하여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들[모압 장로들과 미디안(Midian) 장로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

오바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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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우리는 어떻습니까? 틈만 나면 우리를 대적하는 악의 세력에 대항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악에게 쉽게, 너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굴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 침공이라는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으라고 하지만, 성경 전체에서 악에게 굴복하라는 말씀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시시때때로 나를 무너뜨리려고, 삼킬 자를 찾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우는 사자(lion, 벧전 5:8) 앞에서 대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사자의 먹잇감이 되지는 않습니까? 사도 베드로(Peter)는 분명히 말합니다. The Liberation of St. Peter from prison by an angel, by Giovanni Lanfranco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벧전 5:8-10) 그렇습니다. 나만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형제들도 같은 고난을 당합니다. 나에게만 마귀가 몰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형제들에게도 똑같이 몰려옵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대적하는(standing firm) 것입니다. 그냥 운명이 그러려니 하고 주저앉아 뭉그적거리는 것이 아니라 대적하는 것입니다. 일어서는 것입니다. 만약 나 혼자서 대적하는 것이 너무나 힘겹고 버겁다면, 같은 고난을 받는 형제들과 함께 대적합시다.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소식을 들은 사람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우리’라고 했습니다(옵1...

오바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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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절의 ‘우리’는 저자인 오바댜가 ‘우리’라고 표현했을 수도 있고, 또는 그 자신을 이스라엘과 일치시켜서 ‘우리’라고 표현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에돔에 대한 메시지를 여러 선지자들이 전했는데, 그 여러 선지자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1절부터 4절까지가 예레미야(Jeremiah) 49:14-16에 거의 똑같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옮겨보겠습니다. Jeremiah, as depicted by Michelangelo from the Sistine Chapel ceiling 내가 여호와에게서부터 오는 소식을 들었노라.  사절을 여러 나라 가운데 보내어 이르시되,  “너희는 모여와서 그를 치며 일어나서 싸우라.  보라, 내가 너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작아지게 하였고  사람들 가운데에서 멸시를 받게 하였느니라.  바위틈에 살며 산꼭대기를 점령한 자여,  스스로 두려운 자인 줄로 여김과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독수리 같이 보금자리를 높은 데에 지었을지라도  내가 그리로부터 너를 끌어내리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49:14-16) 우리는 오바댜서를 계속 보겠습니다. 사자(使者, 사절, 특사, envoy)가 전하는 소식을 여러 번역본들에서 살펴봅니다. “너희는 일어날지어다. 우리가 일어나서 그와 싸우자.” 하는 것이니라. (옵 1) 전쟁의 대상인 ‘그’는 에돔을 가리킵니다. 새번역은 "너희는 일어나라. 에돔을 쳐부수러 가자!"라고 기록하고, 공동번역은 "자, 일어나 에돔으로 쳐들어가자!”라고 기록합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기 전부터(창 32:28), 아니 어머니 리브가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창 25:22) 싸우기 시작한 에서의 후예들을 공격하라는 특별한 메시지입니다. 모세의 요청을 거절한(민 20:14-20) 에돔에 대항해서 싸우라는 ...

오바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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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NIV(New International Version)의 각주에 잠언 한 구절을 참고하라고 하는군요. 묵시(revelation, NIV; vision, NASB)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잠 29:18) 선지자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메시지, 즉 예언적 이상(vision)이 묵시입니다. 이 묵시(이상)가 없으면 사람은 방자히 행합니다. 좀 어려운 말인가요? 신중하지 않다(cast off restraint, NIV)는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Message에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이 볼 수 없으면, 스스로 걸려 넘어진다(stumble).’라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율법(wisdom’s instruction, NIV; law, NASB)에 주의를 기울이고(heed, NIV) 지키는(keep, NASB)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내시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Message). 그러니 오바댜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나타내시는 것에 주의를 기울입시다. Vision of Obadiah 1.7. 오바댜 선지자가 전하는 그 묵시(계시, 비전)는 에돔(Edom)에 관한 내용입니다. 야곱(Jacob)의 형 에서(Easu)의 후손인 에돔 족속은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과 끊임없이 싸웠습니다. 그들은 출애굽 당시, 그들의 땅을 지나가게 해달라는 모세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민수기 20:14-20에 그 상황이 나타나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에돔 영역의 변방 모퉁이 한 성읍 가데스(Kadesh)에 이르렀을 때,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냅니다. 청하건대 우리[이스라엘]에게 당신[에돔]의 땅을 지나가게 하소서.  우리가 밭으로나 포도원으로 지나가지 아니하고,  우물물도 마시지 아니하고, 왕의 큰 길로만 지나가고,  당신의 지경에서 나가기까지  왼쪽으로나 오른...

오바댜(1)

Ⅰ. 제목과 서론(1) 오바댜의 묵시라.  주 여호와께서 에돔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소식을 들었나니,  곧 사자가 나라들 가운데에 보내심을 받고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날지어다. 우리가 일어나서 그와 싸우자.” 하는 것이니라. (옵 1) 1.1. 우리의 이름에 뜻이 있듯이 히브리인들의 이름에도 뜻이 있습니다. 오바댜(Obadiah)라는 이름은 ‘주의 종(servant of the LORD)’ 또는 ‘주를 경배하는 자(worshiper of the LORD)’라는 뜻입니다. 안타깝게도 저자인 오바댜에 대해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묵시(vision)’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는 여러 방식 중의 하나로서, 어떤 환상을 통하여 전달되는 하나님의 계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비전’의 뜻은 미래의 꿈, 계획이라는 ‘비전’과는 다릅니다. “주의 종(또는 경배자)이 하나님의 계시를 밝힌다.”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새번역과 공동번역은 ‘계시’라고 번역했고,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의 The Message(이하 Message)에서는 ‘메시지(message)’라고 했습니다. 1.2. ‘묵시(默示, revelation, apocalypse)’에대한 내용을 라이프성경사전에서 찾아봅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칼립시스’의 문자적인 의미는 ‘숨은 것을 드러냄,’ ‘덮개를 벗김’으로, 하나님께서 감춰졌던 자신의 뜻을 성령을 통해 알려주시는 것을 일컫습니다. 묵시는 주로 선지자에 의해 드러나지만(대하 32:32; 암 1:1)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왕상 3:5). 한편 ‘묵시’라는 말은 ‘계시’라는 단어와 같은 어원에서 나왔지만 일반적으로 그 쓰임새는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즉, ‘계시’가 포괄적이고 광의적인 측면에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의 전 역사를 어떻게 나타내 보이느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