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댜(12)


2. 에돔의 철저한 멸망(5-7)

혹시 도둑이 네게 이르렀으며 강도가 밤중에 네게 이르렀을지라도, 
만족할 만큼 훔치면 그치지 아니하였겠느냐? 
혹시 포도를 따는 자가 네게 이르렀을지라도, 
그것을 얼마쯤 남기지 아니하였겠느냐? 
네가 어찌 그리 망하였는고? 
에서가 어찌 그리 수탈되었으며 그 감춘 보물이 어찌 그리 빼앗겼는고? (옵 5-6)

5.1. 동물의 세계를 찍은 다큐멘터리를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더라도 배가 부르면 그만 둡니다. 아무리 포식자라 하더라도 먹을 만큼만 잡아먹고 그만 둡니다. 어떤 다큐멘터리를 보더라도 사자가 욕심을 부려서 더 잡아먹는 내용은 없습니다. “아, 내일을 위해서 더 잡아먹어야지. 아니야, 지금은 배가 부르니까 잡아먹지는 않겠지만, 내일을 위해서 다섯 마리를 미리 잡아두어야지.”라고 말하는 사자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때그때 먹을 만큼만 잡아먹습니다. 그렇게 생태계가 유지되는 모양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 방법이지요.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강도사건이 일어난 뉴스를 보면 깡그리 다 훔쳐갑니다. 남김없이 다 훔쳐갑니다. 물건만 훔쳐가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마저 해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을 그렇게 묘사하셨겠습니까? 비단 도둑뿐만이 아닙니다. 사람은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습니다.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욕심을 부려서 더 먹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배불러 죽겠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많이 먹고 욕심을 부리면 배가 불러서 죽을까요? 고대 로마인들의 이야기를 들어서 아실 겁니다. 먹을 것이 남아돌았던 그 당시에 귀족들은 먹고, 토하고, 또 먹고, 또 토하고, 먹고, 또 토하고…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조차 배불리 먹고 또 먹고 토한다는 것을 본 적이 없고 들은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말이 나왔을까요?

요즈음은 그런 뉴스를 접할 수가 없습니다만, 예전에는 가끔, 아주 가끔, 이런 뉴스를 듣곤 했습니다. 밤중에 도둑이 와서 보니 자기보다 더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어서, 도둑이 오히려 돈을 놓아두고 갔다는 그런 우스갯소리 같은 뉴스 말입니다. 하여간, 사람에게는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강도가 오고 도둑이 들더라도 만족할 만큼 훔치면 그만두었던 모양입니다. 시골출신 분들은 어렸을 때 여름에 수박서리를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도시출신이라 해본 적은 없습니다만, 그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수박을 다 훔쳐가는 게 아니랍니다. 하기야 어린 아이들이 자기 머리통보다도 더 큰 수박을 가져가봐야 몇 개나 더 가져가겠습니까마는. 요즘은 그렇게 서리하는 것도 절도죄로 체포된다고 하니 절대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어쨌든, 우리나라로 치면 수박서리를 하더라도 다 서리해가는 것은 아니고 먹을 만큼만 서리해 갔습니다. 그리고 주인도 어느 정도 눈감아주기도 했지요. 재미있는 관주가 있어서 하나 보고 갑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신 24:19-22)

 
Ruth on the fields of Boaz by 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원래 포도에 관한 관주는 신명기 24장 21절이었습니다만, 그 앞부분까지 적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해 곡식과 올리브와 포도를 다 수확하지 말고 조금은 남겨두라고 하십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시골에선 감나무 등의 열매를 다 따지 않고 좀 남겨둡니다. 까치밥이라고 해서 새들이 와서 쪼아 먹게 조금 남겨두지요. 21절만 인용하지 않고 19절부터 다 인용한 이유는 19절 하반절 때문입니다.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복을 내리시겠다는 약속 때문에 19절부터 인용하기도 했지만,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더 알기 위해 인용했습니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가끔 교회로 찾아오는 객들이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 교회의 도움을 받으려고 오는데,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하며 푼돈을 달라고 합니다. 아마 우리 교회의 사역자들은 나그네를 위하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명령에 따라 그들에게 얼마를 쥐어주곤 합니다. 문제는 그들 중 절대 대다수가 그 돈을 받아 술을 사 마신다는 것이지요. 그걸 알면서도 계속 그들에게 얼마간의 돈을 줘야 하는지 저로서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교회에선 정기적으로 파주보육원에 갑니다. 고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들을 마음에 품는 귀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한 번이라도 다녀오신 분들의 간증을 들으면 우리가 오히려 그 고아들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고 합니다. 과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소위 말하는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 약간이나마 남겨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과연 계속 그렇게 할 수 있는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그들을 위하는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행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쪽 구석에는 회의감이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두 마음을 품는 것 자체가 고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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